직장 상사의 지시를 받아 관광버스를 타고 대구의 한 모델하우스로 이동해 상가 분양 서류와 중도금 대출 서류에 서명을 한 다인건설 직원 수십 명이 신용불량자로 전락했다. 직원들의 주장에 따르면 당시 회사 임원은 '회사를 살려야 한다'며 그들에게 서명을 독촉했다고 한다. 분양률 제고, 자금난 해소라는 명분을 앞세워 직원들을 동원해 미분양·미계약 물량을 털고 사업비를 조달하는 자서분양, 직원 명의로 금융권 대출을 일으켜 그 자금을 회사가 사용하는 방식이다. 다인건설 직원들이 받은 대출금은 시행사 계좌로 입금됐다. 직원들은 이 돈을 받은 적도, 쓴 적도 없었다. 대출을 실행한 새마을금고는 수년 후 다인건설 직원들에게 이자독촉장과 신용불량자 등록 통지서를 보냈다. 

자서분양에 동원된 직원들 입장에선 참으로 억울한 일이었다. 법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사법부는 대출 계약서에 서명한 자가 채무자라고 판단했다. 대구지방법원은 다인건설 직원들이 제기한 약 80억 원 규모 채무부존재확인소송에서 자서분양 과정에서 오동석 다인건설 회장 등 직장 상사들의 '권유와 독려'가 있었다는 점을 인정했음에도, 이를 조직적 강압이라고 판단하진 않았다. 그러면서 중도금 대출 계약서에 직접 사인을 한 건 다인건설 직원 개개인이며, 이들이 이자 납부 확약서도 자신 명의로 금융사에 제출한 만큼, 채무를 이행해야 한다고 판시했다. 다인건설이라는 회사 차원에서 사업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대출을 받은 것이라는 주장은 입증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재판부의 판단은 형식적으로 결코 틀리지 않았다. 직접 대출 계약서에 서명을 한 이상 법적 책임을 피할 수 없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실체적 진실에 가까운 판단이었느냐는 관점에서 봤을 때는 다소 아쉬운 판결이라는 생각이 든다. 맥락을 무시하면 진실과 거리가 먼 판단을 내릴 수 있다.

법원은 그 서명이 사기업이라는 조직 내에서 어떤 맥락 하에 이뤄졌는지 바라볼 필요가 있다. 재판부가 인정한 오동석 회장 등 상급자와 인사권자들의 권유와 독려는, 다인건설 직원들 입장에선 '회사가 어렵다'는 명분으로 포장된 은근한 압박 또는 명시적 지시, 강요 또는 회유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특히 오 회장의 지시는 아마도 '거절할 수 없는 명령'으로 느껴졌을 것으로 여겨지며, 직원들은 이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불이익이 암시되는 분위기와 위력 속에서 대출 서류에 서명했을 공산이 크다. 직원들에겐 사실상 '거절의 자유'가 없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러나 법원은 이 같은 현실적 압박, 조직 내 상하관계라는 맥락을 외면한 채 계약서라는 결과만을 들여다봤고, 직원들이 '개인의 자발적 결정'에 따라 그 계약서에 서명했다고 간주했다. 그들이 실제로 상가를 분양받을 목적으로 중도금 대출 자서를 작성했는지 여부를 파악하기 위한 재판부의 고민이 과연 있었는지 의구심이 든다. 다인건설 직원들이 제기한 채무부존재확인소송은 민사이지만, 그 배경에 있는 자서분양 사태는 분명 형사적 성격을 띠고 있다. 재판부는 실체적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보다 노력해야 하지 않았을까.

더욱이 다인건설 자서분양 사태는 행정부의 감독 부재와 입법부의 제도 미비가 낳은 결과이기도 하다. 2013년 정부는 자서분양을 방지하고자 국토교통부와 금융당국으로 하여금 명의 차용 대출을 원칙적으로 금지하게 하고, 금융기관이 차주의 실제 신분을 확인토록 하는 내용이 담긴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바 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가이드라인에 그쳤고, 일선 현장에 대한 제대로 된 감시·관리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그 결과가 신불자가 된 건설사 직원들이다.

지금 필요한 건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사법적 논리가 아니라 이 같은 편법이 작동하지 않도록 막을 수 있는 제도와 감시 체계임이 분명하다. 이 가운데 사법부는 편법으로 인해 피해를 본 약자를 보호하고, 그들의 절절한 목소리가 사회에 들려질 수 있도록, 일체의 사항들을 두루 참작해 사회 정의에 입각한 판단을 내려야 했다는 생각이다. 그것은 우리 헌법 정신이며, 사법부의 가장 본질적인 역할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번엔 형식적 진실주의에 매몰된 나머지 실체적 진실을 밝히는 데에 소홀했던 것 같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계약만을 근거로 형식적 채무자인 개인에게 모든 짐을 지웠고, 실질적 수혜자에겐 책임을 묻지 않았다. 

법관은 종이에 적힌 서명만 봐선 안 된다. 그 서명을 하게 된 맥락과 배경까지 볼 수 있어야 비로소 실체적 진실에 가까운 판결을 내릴 수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거절할 수 없었던 서명' 때문에 인생 전체를 갚고 있다. [ 슬롯 사이트 정선 카지노 슬롯 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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