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미콘은 빠른 시간 내 운반·타설돼야 한다. 생산 후 90분 가량이 지나면 레미콘이 굳어지기 시작해 사용이 불가하다. 이를 그대로 타설하게 되면 건축 품질 저하로 이어져 콘크리트 균열, 붕괴 등이 발생해 자칫 대형 참사를 불러올 수도 있다. 그러나 서울·수도권 도심으로의 접근성이 우수한 레미콘 공장은 지난 10여 년 새 지속적으로 줄어들었고, 남은 공장은 외곽 지역에 몰린 실정이다. 이 같은 환경에서는 아무리 운송 차량을 확대하더라도 90분이라는 시간을 맞추기 어렵다. 되레 교통 체증 등 다른 사회적 문제를 야기할 공산이 크다. 또한 건설사는 이에 따라 늘어난 운송 비용 부담을 당연히 발주자, 수분양자 등에게 전가할 것이다.
이 같은 현실적 한계를 직시한 정부는 최근 해외 슬롯 배치 플랜트(BP, Batch Plant)를 활성화하는 방안을 내놨다. 지난달 국토교통부는 해외 슬롯BP의 설치 조건을 완화한다는 방침을 발표한 바 있다. BP는 시멘트, 모래 등을 배합해 레미콘을 만드는 시설이다. BP를 건설해외 슬롯에 설치하면 콘크리트믹서트럭으로 레미콘 운송이 어렵거나, 수요량이 급증해 레미콘 공급에 차질이 생길 경우에도 각 해외 슬롯에서 레미콘을 자체 수급할 수 있어 건축 품질 유지와 공기 단축에 효과적이다. 레미콘을 운반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교통 체증, 대기 오염, 소음 공해 등을 줄이는 효과도 누릴 수 있다. 해외 슬롯BP 설치 확대는 PC(Precast Concrete, 사전 제작 후 해외 슬롯 운송 콘크리트)공법과 더불어 건설업계의 시대적 흐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얼마 전 HDC현대산업개발이 서울 광운대역세권 개발사업(서울원 아이파크) 현장에 BP를 설치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것도 이 흐름 위에 있다. 현장BP는 초기 설치 비용이 적잖지만 반복 사용을 통해 비용을 절감할 수 있어 도심 내 대형 건설현장에 안성맞춤이다. HDC현대산업개발은 해당 현장 주변의 도로 상황이 '교통 지옥'이라고 불릴 만큼 혼잡해 공정을 맞추기가 어렵다는 측면에서 현장BP를 설치키로 결정한 것으로 전해진다. HDC현대산업개발이 회사 명운을 걸고 추진하는 대규모 자체사업장인 만큼 운송비 부담을 최소화함으로써 수익성 제고를 꾀하려 했을 것이다. 아울러 광주 화정 아이파크 붕괴 사고를 일으킨 건설사로서 품질 유지에 보다 신경을 쓰기 위한 의도도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반면, 이 시대적 흐름에 역행할 수밖에 없는 이들도 있다. 해외 슬롯BP가 활성화되면 먹고 사는 일에 큰 지장을 받게 될 콘크리트믹스트럭 노동자들이다. 한국노총 산하 전국레미콘운송노동조합(레미콘운송노조)은 HDC현대산업개발의 광운대역세권 개발사업 해외 슬롯BP 설치 계획에 반발해 해외 슬롯BP를 설치한 건설업체의 사업장에 대한 레미콘 운반을 전면 중단한 상태다. 이들은 90분 내 레미콘 운송이 충분히 가능한 해외 슬롯에 BP를 도입하는 건 자신들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처사라는 이유로 셧다운에 돌입했다. 특히 레미콘운송노조는 지난 7일부터 HDC현대산업개발의 전국 건설해외 슬롯을 대상으로 레미콘 납품을 거부 중으로, 최근에는 HDC현대산업개발 본사와 정몽규 HDC그룹 회장 자택 앞에서 규탄 집회를 열기도 했다.
이들은 "HDC현대산업개발은 대기업-중소기업간 상생을 도외시하고, 중소레미콘기업와 레미콘 운송사업자들을 벼랑 끝 위기로 내몰고 있다. 살기 위해서 모든 현장에 레미콘 운송을 거부하기로 했다"며 "반포, 압구정 등 서울 중심 도심지의 대규모 건설현장 내 BP 설치는 레미콘 공급이 어렵기 때문에 이해하고 공감하겠으나, 광운대역세권은 상대적으로 외곽에 있고 현장 인근에 90분 내 레미콘 운송이 가능한 레미콘 제조 공장이 위치해 있다. 무분별한 현장BP 설치는 레미콘 산업의 붕괴를 불러올 것"이라고 말했다.
레미콘운송노조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레미콘 운송 노동자들은 우리나라 건설산업의 성장과 함께해 왔다. 위험을 감수하고 밤낮으로 도로를 달리며 건설현장의 시간을 지켜온 주역이다. 현장BP 확대 시 그들의 일감이 줄어드는 건 분명한 사실이고, 그들이 체감하는 생계의 위기감은 더욱 고조될 것이다. 그러나 생존권이라는 구호만으론 현장BP를 설치한 건설사 사업장에 대한 전면 셧다운의 당위성을 확보하기 어렵다. 건설현장 파업은 건설 노동자들에게 한때는 효과적인 투쟁 수단이었지만, 고(高)집값·고물가 시대에선 시민에게 과도한 불편과 부담을 주는 행위로 인식된다. 과거의 방식으로만 싸운다면 레미콘운송노조는 국민들로부터 공감을 얻기는커녕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이다.
더욱이 참으로 아쉽게도, 역사가 말해주듯 산업 발전의 흐름은 노동자들의 지난 노고를 안타까워하며 멈춰 서주지 않는다. 앞서 거론한 바와 같이 현장BP 설치 확대는 건설현장에 양질의 레미콘을 적기에 공급해 건설 품질을 강화하는 데에 기여할 수 있고, 교통 체증과 환경 오염 등 문제를 줄임으로써 시민 삶의 질을 제고하는 데에도 도움을 줄 수 있다. 수많은 레미콘 공장이 문을 닫고, 부동산 경기 침체로 남아있는 공장의 가동률마저 떨어진 가운데 현장BP 확대는 레미콘 공급을 안정시키고 품질을 유지하기 위한 정책으로 이미 자리 잡은 상황이다.
아마 레미콘운송노조도 이 부분을 인지하고 있는 눈치다. 국민 지지를 조금이라도 얻기 위해 다소 무리한 의혹까지 제기한 것으로 보여서다. 현재 노조 측은 "HDC현대산업개발은 대-중소기업 상생을 도외시하고 있음은 물론, 특정 회사에 대한 일감 몰아주기를 자행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HDC현대산업개발이 광운대역세권 개발사업 현장에서 BP 관련 용역을 맡긴 업체가 현대자동차그룹과 사돈기업인 삼표그룹 계열 삼표산업이라는 이유에서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정도원 삼표그룹 회장의 장녀의 남편이고, 정몽규 HDC그룹 회장은 정의선 회장의 5촌 당숙이다. 그리고 HDC그룹 계열 HDC현대산업개발은 범(凡)현대가로 분류되는 기업이다.
물론, 삼표그룹이 중장기적인 차원에서 해외 슬롯BP 사업에 투자 중인 건 분명한 사실이다. 삼표그룹은 '삼표 모바일 배치 플랜트'라는 신사업을 지난해부터 본격 추진하고 있다. 고정식이 아닌 이동 가능한 BP여서 각 해외 슬롯 환경에 맞춰 최적화된 동선 배치가 가능하다는 장점을 내세우고 있으며, 특히 레미콘믹서트럭 운행을 최소화해 탄소배출 감축에도 효과적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서로 일감을 주고받는 게 범현대가 계열 회사들의 가풍(?)이기도 하다. 그러나 5촌 조카의 처가를 돕기 위해 5촌 아저씨가 해외 슬롯BP를 설치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엔 근거가 빈약하다. 설사 이 같은 의혹이 사실이라고 해도 해외 슬롯BP 확대의 필요성과 타당성을 부정하긴 어렵다.
레미콘운송노조를 무작정 힐난하려는 게 아니다.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북미, 유럽 등 선진국의 여러 레미콘 전문업체들은 이미 기존 공장을 현장BP로 대체하고 있는 추세다. 우리나라도 빨리 과도기로 진입해야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 이 같은 변화 속에서 레미콘운송노조가 해야 할 일은 셧다운이 아니라, 과도기에 자신들의 역할과 가치를 어떻게 재정립할지 고민하는 것이다.
현장BP 설치 조건이 일부 완화됐지만 건설현장 수요량의 절반은 사업장 주변 레미콘 공장에서 공급받도록 하는 생산량 제한 규정 등이 그대로 유지됐다. 현장BP 설치가 확대될수록 범정부 차원의 콘크리트 품질 관리·감독은 더 엄격해질 가능성이 높다. 레미콘 운송 노동자 입장에선 '프리미엄 레미콘 운송 사업자'로 자리매김할 기회가 될 수도 있는 대목이다. 노조 차원에선 현장BP를 운영하는 레미콘업체와 직접 대화에 나서서 상생 협약 등을 체결하는 데에 주력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예컨대 특정 비율 이상의 물량은 노조 소속 차량으로 운송하는 방향으로 협상을 이끌어 안정적 물량을 확보하는 것이다. 나아가 정부가 주도하는 BP 제도 개선 논의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 '노동 존중'을 표방하는 이재명 정권이 출범한 만큼, 광장이 아닌 회의장에서 공식적인 정책 파트너로 거듭난다면 과도기 속 생존권을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이다.
국내 건설현장 내 BP 확대의 흐름은 되돌릴 수 없는 현실이 됐고, 이로 인해 레미콘 공급 시스템은 점진적 개편이 불가피해졌다. 현장BP의 확대는 궁극적으로 가야 할 길이다. 변화를 막을 방법보다는 변화 속에서 효과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 슬롯 사이트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