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국내 탑3 석유화학업체인 여천NCC(여천엔씨씨)가 부도 위기에 직면했다가 공동 대주주인 DL그룹(구 대림산업그룹)과 한화그룹의 자금 지원으로 겨우 기사회생하는 일이 있었다. 이 사태에서 DL그룹, 한화그룹은 상당한 갈등을 빚었다. DL그룹은 여천엔씨씨가 워크아웃(기업재무구조 개선) 절차를 밟아야 살아남을 수 있는 상황이라며 자금 지원에 난색을 표한 반면, 한화그룹은 대주주로서 책임경영 실천 차원에서 마땅히 자금을 수혈해줘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양측은 각각 1500억 원 규모의 자금을 대여키로 결정했고, 여천엔씨씨는 가까스로 디폴트(채무불이행)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대한민국 석유화학업계를 뒤흔든 이번 사태는 우선 일단락됐지만 이 과정에서 한화그룹 측이 폭로한 비화(祕話)로 인한 여진은 이어지고 있는 분위기다.
이해욱 DL그룹 회장은 지난달 한화그룹 관계자들과 가진 회의에서 "내가 만든 회사(여천엔씨씨)지만 신뢰가 안 간다. 디폴트에 빠져도 답이 없는 회사에 돈을 꽂아 넣을 수 없다. 여천앤씨씨가 만든 자구책을 믿지 않는다"고 발언한 것으로 전해진다. 동석한 김종현 DL케미칼 대표도 "계속 돈을 투입하는 구조는 DL에 과도한 리스로, 감당 불가능해질 수 있다"고 우려한 것으로 알려졌다. 즉, 이 회장과 DL그룹은 여천엔씨씨의 회생이 어려운 상황이라고 판단했음에도, 자금 회수 가능성이 낮다는 걸 알고도 1500억 원의 자금을 지원해준 것이다. 또한 한화그룹의 주장에 따르면 여천엔씨씨 경영진은 회사 손해를 인식하면서도 DL 측에 저가로 물품을 납품해 국세청으로부터 962억 원 가량의 법인세를 추징당했다고 한다.
이는 경우에 따라서 배임죄 적용을 배제할 수 없는 사안이다. 과거 검찰은 2012년과 2015년 당시 SKC의 자회사인 SK텔레시스가 회생 불가능한 상태임을 인지했음에도 SKC가 SK텔레시스에 유상증자 등을 통해 자금을 투입했다는 이유로 최신원 전 SK네트웍스 회장, 조대식 당시 SK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을 비롯한 관련 SK그룹 경영진을 배임 혐의로 기소한 바 있다. 아울러 한화그룹 측이 주장하는 '여천엔씨씨-DL그룹간 저가 공급 계약'이 사실이라면 불공정거래는 물론, 여천엔씨씨 경영진에 대한 배임죄도 성립될 수 있다.
물론, 위와 같은 사안에 배임죄가 인정될 가능성은 무척 낮다. 우리나라 대법원은 "경영자가 선의를 갖고 신중히 결정했음에도 손해가 발생한 경우까지 업무상 배임죄를 물으면 기업가 정신을 위축시켜 사회적으로 큰 손실이 발생한다"며 정상적 경영 행위에 대해선 배임으로 보지 않겠다는 판례를 남겼다. 이에 따라 앞서 언급한 SK텔레시스 유증에 참여한 SKC에 대한 배임죄 혐의도 법정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문제는 현 제도 하에선 검찰 기소 등 법적 리스크가 상존한다는 데에 있다. 귀에 걸면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다. 정치·경제적 상황과 국면에 따라 기업가들에게 언제든 배임죄를 씌울 수 있는 실정이다. 국내외 경기 침체가 심화되고 있는 가운데 경영 판단 하나하나가 형사 리스크로 비화하고, 경영 개선 여지가 충분한 회사에 대한 자금 지원 결정마저 검찰이 배임죄로 기소할 수 있는 환경이라면, 경영가는 위험을 감수하기보단 투자 회피를 택할 수밖에 없다.
이재명 대통령이 최근 "한국에서 기업 경영 활동을 하다가 잘못되면 감옥에 간다는 얘기가 있는데, 이 탓에 국내 투자를 망설이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배임죄가 남용되며 기업활동을 위축시키고 있는 점에 대해 제도적 개선을 모색해야 할 때다. 과도한 경제 형벌로 기업의 경영활동이 위축되지 않도록 경제형벌 합리화 태스크포스(TF)를 곧바로 가동하겠다"고 선언한 배경도 여기에 있다.
경제형벌 완화가 무조건 선(善)은 아니다. 재벌 대기업 오너일가의 사익 편취, 경영인들의 횡령·배임이 대한민국 기업 지배구조의 고질적 문제라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배임죄 완화 등 제도 개선이 이들의 면죄부로 작동한다면 책임경영은 무너질 것이고, 기업가 정신은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로 전락할 것이다. 하지만 긍정적 효과는 분명히 있다. 합리적 수준의 경제형벌 완화는 기업의 과감한 투자와 신사업 진출을 촉진시킬 수 있다. 특히 요즘 같은 불황기에 배임죄 개선은 기업가들이 보다 과감하게 경영활동을 펼치는 데에 상당한 도움을 줄 것이다.
국내 탑3 석유화학업체를 살리는 경영 판단에도 배임죄가 적용될 여지가 있다는 건 현행법이 어떻게 기업의 불확실성과 산업현장의 긴장을 키우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배임죄 제도 개선에 속도를 내야 하는 이유다. 단, 제도 개편은 무조건적인 완화로만 가선 안 될 것이다. 정상적 경영활동을 보호하되, 오너일가 등 경영진의 사익 편취에는 엄격히 책임을 묻는 투트랙 제도 개선을 추진해야 한다. 정부와 국회가 제도 개선 논의에 하루빨리 본격적으로 착수하길 기대한다. [ 슬롯 사이트 88 슬롯]